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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나는 크리스찬이 되었는가 ?
현대 지성인의 상징 같은 영국의 버틀란트 럿셀은 (나는 어찌하여 크 리스찬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책을 썼습니다. 근대 회의주의를 대표하는 데이빗 흄은 기독교의 신앙에 대해 반발하기를 "믿을 수도 없지만 절대로 믿어서도 안 된다. "고 하며 믿는 것이 일종의 악덕인 것처럼 비난을 했읍니다. 니체는 유럽의 기독교 신앙을 고발하면서 하나님을 죽이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용기를 발휘하기도 했읍니다. 칼 마르크스는 경제론적 인간관 혹은 경제론적 유물사관으로 꿰뚫어서 "기독교는 인민의 아편이고 민중의 아편이다. "라고 낙인 찍어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를 쓰 레기통에 버리게 했읍니다. 심리학자인 프로이드는 기독교를 성적 충동의 승화로 보려고 노력했고,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어거스트 콩트는 사회학의 테두리 속에서 기독교를 해석했읍니다. 그는 인간 문화를 신화 시대, 철학 시대, 과학 시대의 과정으로 구분하고서, 인간이 모든 것을 신화적으로 보고 믿고 해석하고 생각한 미개 문화 시대에 기독교가 발생하였으므로 이제 과학 시대에 들어와서는 마땅히 재검토해야 하고 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읍니다. 그는 그런 말을 함으로 해서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했읍니다. 예수를 신화화시켜 버리려는 운동을 이 사람뿐 만 아니라 근대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읍니다. 미국의 신학자인 하비 콕스는 (세속의 도시와 하나님의 혁명)을 쓴 사람인데 인간만이 아니라 하나님도 혁명해서 써야 한다고 주장했읍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의 신은 잘못 만들었으므로 우리가 새 신들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며 현대인의 기호에 맞고 실용성 있는 알맞은 신을 등장시키기도 하였읍니다. 알티저는 독일 아닌 미국에서 하나님을 사형시켰다며 공산권에서는 "하나님을 아주 죽인 것은 아니고 아직도 존명을 부지하고 있다. "고 주장 하고 있읍니다. 한쪽에서는 예수를 폭력 혁명가로 만들고 자기 마음대 로 예수의 이미지를 창조해서 혼난상을 이루고 있읍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유명한 신앙인들이 "나는 어찌하여 크리스찬이 되었는가?" 하는 신앙 고백을 썼읍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인인 우찌무 라 간조는 (나는 어찌하여 크리스찬이 되었는가?)를 영문으로 써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읍니다. 중국의 임어당은 중국의 휴머니즘을 탈적하여 어떻게 크리스찬이 되었는가를 써서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발표했는 데 이것은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자기는 중국의 휴 머니즘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에 가서 여러 가지를 듣고 보고 나서 크리스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자기 인생의 역정의 참회록처럼 고백했읍니다. C.S. 루이스는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에서 문학 강의를 하던 대 영문학자인데 "나는 어찌하여 크리스찬이 되었는가" 라는 신앙 고백을 그의 많은 저서에서 발견할 수 있읍니다.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의 문학 세계를 보면 지금까지 그만큼 인간 내면의 실존의 세계를 기술한, 넓고 중량감이 큰 문학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 아직도 나오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는 인간의 모든 상황들이 다 다루어지고 그 분위기와 주제가 거의 예외없이 신학적이고 영적인 것들 이었읍니다. 그에 대한 공감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공감입니다. 우리 나라 정신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골 2 : 6∼8) (요 6 : 6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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