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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그리움
제가 최근 한 100년 동안에 영국이나 프랑스 혹은 독일 등에서 현대 시인들의 인생을 찾는 무드에 운명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찾아보기 위해 시를 들추어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여기저기에서 발견했습니다. 셀리의 시에 '나를 위하여 희망도 공포도 품지 말라.'고 한 구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구절에 보면 '좋은 세상이다. 웃으려면 웃어라. 나의 운명은 덧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운명은 덧없기만 하다고 했습니다. '졸음같이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운명의 슬픈 생을 울어 버리리.' 이렇게 자기에게 졸음같이 죽음이 다가오는데 자기 운명의 슬픈 생을 울어 버리고 싶다는 시를 썼습니다. 그의 글에 보면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는 바람아 ! 근심된 얼굴로 헤매는 나그네여 ! 미운 바다 여기 이 세상의 문짝마저 닫혀 있다. 아 ! 나뭇가지 물결 사이에 남모르는 여인숙이 있느냐 ! ' 부는 바람을 향해서 자기를 근심된 얼굴로 헤매는 바람과 같은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미운 바다 여기 이 세상의 문짝마저 닫혀 있다. 아 ! 나뭇가지 물결 사이에 남모르는 여인숙이 있느냐 ! '는 것은 갈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디에 머물 곳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역시 인생을 방랑하는 나그네였습니다. 타고르는 우리들에게 그리운 님을 가르쳐 줍니다. 저는 우리 나라의 시인 한 용운 씨의 (님의 침묵)이라는 시를 몹시 즐겨 읽었습니다. 타고르의 시를 읽어보면 타고르가 한 용운을 닳았는지, 한 용운이 타고르를 닳았는지 잘 모르지만 둘 다 그리운 님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시집을 보면 그들의 님은 둘 다 왔다가 가 버리는 님입니다. 릴케도 마찬가지입니다.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 잡히지 않는, 보일 듯 보일 듯 하면서 보이지 않는, 목은 마른데 목을 축일 수 없는, 불러도 대답이 없는, 그런 알 수 없는 님입니다. 타고르의 (그는 온다)라는 시집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의 눈은 슬퍼진다. 그 눈을 보니 나도 슬퍼진다. 그는 가슴에 품고 있는 일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왔다가 가 버린다. ' 자기의 님이 오기는 오는데 슬퍼하는 표정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슬픔을 절대로 말하지 않았고 침묵을 지킵니다. 그리고 왔다가 머물러 주지 않고 그냥 가 버립니다. 언제나 붙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2:10∼13)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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